축구 황제 펠레는 유럽리그에 안간것인가 못간것인가?

이번 포스팅에서는 세계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축구 선수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는 펠레 선수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브라질에서 펠레를 국보로 지정했던 것 또한 펠레의 축구경기를 취소하지 않기 위해서 전쟁을 휴전한 나라도 있었다는 것은 펠레가 얼마나 위대한 선수였는지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일화들입니다.

이런 위대한 펠레 선수에 대한 재미난 사실이 한가지 있는데 그것은 당시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였던 펠레는 한번도 유럽 프로축구리그에서 선수생활을 한적이 없었다 사실입니다. 못 간것인지 또는 안 간것인는 모르겠지만 펠레와 같은 최고의 선수가 왜 유럽프로축구팀에서 선수생활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럼 과연 펠레는 어떤 선수였는지 그리고 왜 펠레는 유럽에 진출하지 않았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마도 펠레의 본명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펠레의 본명은 펠에지송 아리치스 두나시멘투(Edison Arantes do Nascimento) 라고 하며 펠레라는 이름은 그의 별명이라고 합니다. 펠레라는 별명은  그가 어린시절 아버지의 친구였던 골키퍼 빌레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고 "펠레"라고 발음해서 붙여지게 된 별명이라고 합니다.

이후에 동네, 학교 등 에서 그를 펠레라 부르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그의 아버지 조차도 그의 아들을 펠레라 부르게 되면서 그의 별명은 펠레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순간 부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본명이 아닌 펠레라는 별명으로 기억하게 되었고 그가 축구선수가 되어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를 펠레라는 선수로 인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펠레가 축구 선수가 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 준 사람은 축구선수 출신이었던 그의 아버지였는데 그는 펠레가 축구선수가 될 수 있도록 기본기와 노하우를 알려준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후 펠레는 비록 친선경기였지만 1956년 15세의 나이에 브라질리그 산토스 FC 에서 데뷔하였고 이듬해인 1957년 16세의 나이로 상하위리그 합산 38경기에서 41골을 기록하며 축구 신동의 탄생을 세상에 알리게 됩니다. 그는 산토스 FC에서 1956년에서 1974년까지 605경기 589득점을 기록한 정말로 믿을 수 없는 기량과 득점력을 보여준 선수였습니다.

국가대표팀 맴버로는 1958년 17세의 나이에 월드컵에 출전하였으며 1958년, 1962년, 1970년 3번의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유일무이한 월드컵에서 3번의 우승을 경험한 선수입니다. 또한 3번째 우승을 통해 월드컵 우승 트로피인 줄리메 컵을 브라질이 영구 소유할 수 있도록 한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여담이지만 브라질이 받았던 줄리메 컵은 1983년 도난당하여 현재까지도 아무도 그 행방을 모르는 사연이 있는 우승 트로피이기도 합니다.

그럼 왜 이런 엄청난 선수를 유럽 프로팀에서 스카우트하지 않았는지 궁금해 지는데 그럼 이제 그가 유럽에 진출하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브라질리그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던 때 레알 마드리드를 비롯한 유럽의 명문구단들은 그를 스카우트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가 유럽에 가지고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당시의 프로축구선수의 신분은 지금과는 다르게 계약조건이 선수에게는 절대적으로 불리하였고 선수가 원한다고 해서 이적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주가가 폭등하고 팀에 많은 돈을 벌어다주고 있으며 미래가 창창한 펠레라는 10대의 스타를 유럽에 팔아서 얻을 수 있는 수익보다는 그를 상품화하여 벌어들일 수익이 더 많을 것이라는 산토스 구단의 판단이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펠레는 그의 자저선에서 "어머니가 만든 쌀과 콩을 좋아했고 나는 브라질에서 편안하고 행복했다” 라고 밝혔 듯 당시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상황이라 유럽진출을 강력하게 원하지 않았었던 것도 그의 유럽이적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지 않았던 이유라고 합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1961년 브라질 대통령이었던 야니오 콰드로스는 펠레를 국보로 지정하였고 국가 자산 즉 국보는 수출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축구선수를 국보로 지정한다는 것은 말도 안돼는 일이었지만 펠레의 경기를 자국에서 계속 보고 싶어했던 당시 브라질 국민들도 펠레의 국보지정과 수출금지에는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후에 펠레가 계속해서 해외에 진출하지 못한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처음으로 해외에 진출한 것은 유럽이 아닌 미국이었고 그의 나이는 이미 30대 중반에 접어든 때 였습니다. 그는 1975년  미국 뉴욕의 코스모스팀과 350만 달러라는 당시에는 천문학적인 돈을 받고 계약하였고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펠레의 해외진출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