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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국가대표 A매치 경기 예매 성공 방법

축구 국가대표 A매치 경기의 예매는 경기의 상대에 따라 다르지만 굉장히 경쟁이 치열해서 표를 예매하는 것은 물론이고 좋은 좌석을 확보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 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매 오픈 시간에 들어가도 티켓을 예매하는 것은 소위 말하는 하늘의 별따기이며 성공 확률이 그리 높지 않습니다. 하지만 약간의 준비만 있다면 표 예매에 성공할 확률은 높일 수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어떻게 하면 예매를 빠르게 할 수 있는지 정리해 보았으니 축구 국가 대표 A매치 경기를 예매하고자 하는 분들은 아래의 글을 읽어 보시면 많은 큰 도움이 될 것 입니다. 참고로 현재 확정된 다음 A매치 경기 일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아래의 경기들은 PLAY KFA 에서 예매가 가능합니다. 2023년 6월 16일 (부산):  VS 페루 (일반예매 오픈일: 6월 6일 화요일 19:00) 2023년 6월 20일 (대전):  VS 엘살바도르 (일반 예매 오픈일: 6월 9일 금요일 19:00 ) 위의 경기를 예매하고 싶으신 분들은 아래의 순서대로 준비하고 예매하시면 보다 빠르게 예매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A매치 예매 사이트 PLAY KFA 회원가입 예매 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예매 사이트인 PLAY KFA 에서 회원가입을 하는 것 입니다. 회원가입을 먼저 하는 이유는 예매 오픈시간에는 워낙 많은 접속자들이 있어서 회원가입 속도도 느릴 뿐만 아니라 예매를 하기 위해서 회원가입을 할 시간 동안 수천명이 추가로 접속하기 때문에 예매 좌석을 확보할 확률이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회원가입은 일찍 할수록 좋지만 아무리 늦어도 최소 예매 오픈일 1-2일 전에는 꼭 해야 만 합니다. 회원가입 시 결제정보도 미리 입력해 두면 예매를 빠르...

역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한국 축구 경기 TOP 5

한국 축구 역대급 시청률을 기록했던 경기들   오늘은 한국 축구 경기 중 역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5경기의 시청률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경기는 대부분 축구의 메이저 대회라고 할 수 있는 월드컵에서 나온 경기들 입니다. 하지만 성인 월드컵이 아닌 청소년 대회에서 나온 높은 시청률 경기도 있어서 소개할 시청률 기록이 더욱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나라의 스포츠 경기 전체의 시청률 TOP 5의 모든 경기가 축구 경기라는 것 입니다. 이는 축구의 국제 경기 즉 A매치가 우리 국민이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스포츠 종목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시청률이라는 것이 조사 시기 또는 방법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100%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소개할 순위는 충분히 흥미롭게 볼 수 있는 데이터라고 생각됩니다. 그럼 역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한국 축구 경기 TOP 5를 5위 부터 순서대로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5위: 2002년 한일 월드컵 폴란드 전 (시청률: 66.1%) 이 경기는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2002년 월드컵 한국의 1차전 경기로 우리나라의 월드컵 첫승에 대한 기대로 정말로 많은 국민들이 시청했던 경기입니다. 무엇보다 이 경기의 관심사는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의 월드컵 1승 달성 여부였는데 폴란드에 2 대 0 완승을 거두며 국내에서 개최된 월드컵의 흥행에 불을 지핀 경기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위: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탈리아 전 (시청률: 66.7%) 2002년 월드컵 16강전으로 펼쳐진 이탈리아전은 아마도 많은 축구팬들이 기억하는 한국 축구 명승부 중의 하나일 것 입니다. 이탈리아전에서 느꼈던 감동과 축구의 열기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될 정도로 이 경기는 한국 축구 역사에서 손꼽히...

기네스북 등재된 놀라운 축구 기록들 (feat. 북한 등)

기네스북에 등재된 축구 기록 기네스북은 세계의 놀라운 기록들을 심사하고 등재시키는 책을 말합니다. 기네스북에 등재되는 기록들은 주기적으로 업데이트가 되며 매년 새롭게 발간되는 책으로도 판매되고 있습니다. 기네스북을 살펴보면 놀라운 기록들이 많이 있는데 축구 종목에서도 꽤나 흥미있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특이하게 축구 분야 기네스북에는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기록도 있습니다.  참고로 야구 종목 기록 중 기네스북에 등재된 놀라운 기록은 아래의 글을 클릭 하시면 확인해 보실수 있습니다. 기네스북 오른 말도 안되는 야구기록 10가지 그럼 이제 기네스북에 등재된 축구 기록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최대 수용인원 경기장 - 북한 평양 능라도 경기장 (15만명) 북한의 수도 평양에 있는 능라도 경기장의 수용인원은 15만명으로 이곳은 기네스북에 최다 수용인원 경기장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물론 능라도 경기장은 축구 전용 구장이 아닌 종합경기장이지만 기네스북에서는 이 경기장을 축구경기를 할 수 있는 곳으로 인정해 최대 수용인원 경기장으로 등재했다고 합니다. FIFA 월드컵 단일대회 최다골 국가 - 헝가리 (27골) 단일 월드컵 대회에서 최다골을 기록한 국가는 헝가리라고 합니다. 헝가리는 1954년 월드컵에서 27골을 기록하여 아직까지도 월드컵 단일대회 최다골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대회에는 우리나라도 참가했는데 헝가리에 9:0 으로 패하며 이 기록의 기네스북 등재에 희생양이 되기도 했습니다. 최장수 축구 심판 - 세르니 게자 (57년) 축구 역사상 가장 오랫 동안 심판으로 활약한 사람은 헝가리 출신의 세르니 게자 심판이라고 합니다. 그는 1950년 부터 2007년 까지 축구 심판으로 활약했으며 그의 기록은 당당히 기네스북에 등재된 아주 특이한 축구 기록 중 하나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최장 거리...

축구선수 김민재가 영화의 대사를 문신으로 새긴 이유는?

김민재 선수의 문신 이야기 오늘은 한국 축구대표팀  수비수 김민재 선수에 대한 이야기와 그가 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명대사를 타투로 세긴 이유를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김민재 선수에 대해서 간단하게 알아볼께요. 김민재 선수의 프로 데뷔는 국내 최강팀이자 아시아에서도 정상권에 있는 클럽 전북 현대에서 활약하다가 현재는 유럽에 진출하여 활약을 하고 있는 선수입니다. 김민재선수는 이미 국가대표팀에서도 없어서는 안될 선수이고 이미 유럽의 유명 클럽으로의 이적이 점쳐지고 있는데 일단 그이 피지컬이 놀랍습니다. 신장은 189cm이고 몸무게도 약 95kg 정도의 거구로 일단 피지컬에서는 왠만한 유럽선수에 뒤지지 않는 선수입니다. 당시 전북 현대의 최강희 감독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고 합니다. “김민재는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유형의 중앙수비수다. 힘과 파워가 있으면 세기가 떨어지고, 키가 크면 스피드가 떨어지기 마련인데 김민재는 그렇지 않다” 즉 힘과 파워가 있으면서도 어느 정도의 수비수가 갖추어야 할 세기가 있다는 뜻입니다. 김민재 선수가 문신을 새기 이유는? 이런 그에서 특이한 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몰에 세긴 타투 문신입니다. 팔뚝에는 '꿈을 멈추지 마라. 시간은 기다리지 않는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고. 가슴에는 ‘Carpe Diem’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Carpe Diem은 라틴어로 현재를 즐겨라라는 뜻으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명대사 중 하나입니다. 갑자가 축구 얘기를 하다가 영화 얘기를 하는 것이 조금은 쌩뚱맞기는 합니다만 Carpe Diem’는 죽은 시인의 사회의 대사로 Oh, My Captain과 함께 이 영화의 명대사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대사 중의 하나 입니다. 김민재는 선수는 이 타투를 새긴이유를 현재를 즐기는 게 제일 중요하고 기회가 있을 때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 문신을 새겼다고 합니다.  김민재선수는 타투를 새긴 이후에 부모님께서 뭐라고 하실까 봐 걱정을 했는데 별 말씀을 안 하셨다고 ...

실명한 눈으로 월드컵에 출전한 첫번째 축구 선수 이태호

 축구에서 “도쿄대첩”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선수가 누구일까요?   개인적으로는 1997년 일본과의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2 대 1 역전골을 성공시킨 이민성 선수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일본전 결승골의 주인공 황선홍!  2009년 도쿄에서 열린 한일 평가전 결승골의 주인공 안정환!  2010년 도쿄에서 열린 한일 평가전 선취 골과 산책 세레머니의 주인공 박지성! 이 선수들은 지금까지도 일본과의 원정경기에서 통쾌한 골을 터트리며 우리팀을 승리로 이끈 선수들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잠시 잊고 있던 또 다른 한일전의 영웅이 있었는데 오늘 그 선수들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그 선수는 바로 전 국가대표 축구선수 이태호 선수입니다. 이태호는 정말로 대단한 선수였습니다. 그는 최고의 스크린 플레이 테크니션이었고 한국의 게르트 뮐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프로리그 181경기 출전, 57골 21도움을 기록하였고 A매치에서는 67경기에서 21골을 기록한 선수입니다. 또한 국제 무대에서는 1988년 AFC 아시안컵 득점왕을 차지한 선수이기도 합니다. 그럼 이제 이태호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1985년 10월 26일 일본 도쿄에서는 월드컵 예선 최종라운드 1차전이 열렸습니다. 32년만에 월드컵 본선진출을 노리고 있던 한국은 1차전을 일본 원정으로 치르는 다소 부담스러운 일정이었습니다. 숨을 죽이며 경기를 지켜보던 전반 23분 최순호의 크로스를 받은 이태호는 페인팅으로 수비를 제치고 추가골을 기록합니다.  이 골은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불리웠던 이태호의 진가를 보여주었던 골이었으며 이 골로 선수들은 원정경기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대표팀은 이태호의 추가골에 힘입어 일본을 2-1로 누르고 원경경기 승리를 기록하게 됩니다. 이후 서울에서 열린 2차전에서 일본을 1-0으로 누르고 32년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는 감격스러운 순간을 맞이 하게 됩니다. ...

수비수, 미드필더와 공격수로 모두 베스트 11에 선정된 최고의 멀티 플레이어 유상철

이번 포스팅에서는 우리나라 축구 역사에서 최고의 멀티 플레이어 중 한명으로 평가되고 있는 유상철 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유상철 선수는 축구 명문 경신고등학교에서 선수생활을 했지만 사실 고등학교 1학년 까지는 신장이 너무 작아서 크게 두각을 나타낸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2학년 무렵부터 키가 부쩍 자랐고 꾸준한 운동으로 체력적인 부족함을 메우면서 서서히 실력을 갖춘 유망주로 성장을 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경신고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U-19 대표팀에 선발되어 1990년 AFC U-19 챔피언십에서 북한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대회 출전을 눈앞에 두게 됩니다. 하지만 1991년 포르투갈 U-20 월드컵에는 남북단일팀이 구성되었는데 유상철 선수는 최종명단에서 탈락하며 세계대회 출전이 무산되는 결과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다른 축구 명문대학들의 스카우트 제의도 있었지만 유상철 선수는 자주 출전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던 건국대학으로 진학을 결정하게 됩니다. 당시 건국대학에는 황선홍 선수가 있었는데 유상철 선수는 황선홍의 잦은 대표팀 차출로 1학년 부터 공격수로 뛸 수 있는 기회가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황선홍 선수가 “공격수로 대학에 입학했는데 경기는 미드필더로 뛰었던 선수”로 기억할 정도로 유상철 선수는 아마추어 시절부터 멀티플레이어로서 재능을 보인 선수였습니다. 대학시절의 좋은 활약으로 그는 1994년 3월 대표팀에 선발되어 대표팀 데뷔전을 갖게 되는데 이날 그의 포지션은 수비형 미드필더였다고 합니다. 대표팀 데뷔전을 치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유상철 선수는 1994년 현대 소속으로 프로에 데뷔하게 되는데 이 경기에서 오른쪽 윙백으로 출전하며 또 한번 변신에 성공하게 됩니다. 유상철 선수는 1994년 신인이었지만 수비수로서 베스트 11에 선정되면서 프로축구에서도 최고의 선수 반열에 오르며 그의 멀티 플레이어 능력을 입증합니다. 또한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는 8강...

축구 황제 펠레는 유럽리그에 안간것인가 못간것인가?

이번 포스팅에서는 세계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축구 선수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는 펠레 선수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브라질에서 펠레를 국보로 지정했던 것 또한 펠레의 축구경기를 취소하지 않기 위해서 전쟁을 휴전한 나라도 있었다는 것은 펠레가 얼마나 위대한 선수였는지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일화들입니다. 이런 위대한 펠레 선수에 대한 재미난 사실이 한가지 있는데 그것은 당시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였던 펠레는 한번도 유럽 프로축구리그에서 선수생활을 한적이 없었다 사실입니다.  못 간것인지 또는 안 간것인는 모르겠지만 펠레와 같은 최고의 선수가 왜 유럽프로축구팀에서 선수생활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럼 과연 펠레는 어떤 선수였는지 그리고 왜 펠레는 유럽에 진출하지 않았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마도 펠레의 본명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펠레의 본명은  펠에지송 아리치스 두나시멘투(Edison Arantes do Nascimento) 라고 하며 펠레라는 이름은 그의 별명이라고 합니다.  펠레라는 별명은    그가 어린시절 아버지의 친구였던 골키퍼 빌레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고 "펠레"라고 발음해서 붙여지게 된 별명이라고 합니다. 이후에 동네, 학교 등 에서 그를 펠레라 부르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그의 아버지 조차도 그의 아들을 펠레라 부르게 되면서 그의 별명은 펠레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순간 부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본명이 아닌 펠레라는 별명으로 기억하게 되었고 그가 축구선수가 되어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를 펠레라는 선수로 인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펠레가 축구 선수가 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 준 사람은 축구선수 출신이었던 그의 아버지였는데 그는 펠레가 축구선수가 될 수 있도록 기본기와 노하우를 알려준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후 펠레는 비록 친선경기였지만 1956년 15세의 나이에 브라질리그  산토스 FC  에서 데뷔하였고 ...

하프타임에도 담배를 피우던 브라질 축구 선수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철학자? 축구선수? 이번 포스팅에서는 1970년, 1980년 대에 활약했던 이름부터 특이한 브라질 출신 축구선수 소크라테스 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그는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 60경기에 출전하였고 1983년 남미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하였으며 20세기 최고의 축구선수 100인에 선정된 브라질 축구 레전드입니다. 소크라테스 선수는 고대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이름이 같다는 점 이외에도 특이한 점이 많은 독특한 삶을 살았던 축구선수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의 커리어 보다는 그에 대한 재미나고 특이한 사실들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축구선수 소크라테스의 젊은시절 소크라테스의 본명은 소크라테스 브라질레이루 삼파이우 지 소자 비에이라 지 올리베이라 (Sócrates Brasileiro Sampaio de Souza Vieira de Oliveira)라고 하는데 정말로 이름이 긴 축구선수로도 유명합니다.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은 그의 아버지가 고대 철학자였던 소크라테스를 생각하며 지어준 이름이며 형제들의 이름 모두가 그리스 문학에 나오는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현역시절 한때 머리와 수염을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비슷하게 길러서 그의 외모는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연상시키곤 했습니다.  브라질 국가대표 시절 팬들은 이런 그의 외모와 미드필더로서 오른발 왼발을 모두 자유롭게 사용하는 그를 보고 “그라운드의 철학자”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은퇴 후에 철학을 전공하였고 철학 박사학위까지 취득하며 정말로 철학자가 되었으며 이름에 걸 맞는 삶을 살았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소크라테스와 관련된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은 그는 의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정말로 좋은 가정의 첫째 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좋은 환경에서 자란 탓인지 그는 학창시절 우수한 학업성적으로 의과대학에 입학하며 전문의사를 꿈꾸고 있었던 엘리트 중의 엘리트 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학창시절부터 축구를 즐겼던 그는 의대 재학 중 아버지...

속도 34km/h 이상의 스피드로 달릴 수 있는 축구 선수 TOP 10

이번 포스팅에서는 순간 스피드 34km/h를 이상을 달릴 수 있는 대표적인 선수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축구선수의 속도 즉 스피드는 축구 경기에서 상당히 중요한 신체적인 능력중에 하나입니다. 아무래도 스피드가 빠르면 여러가지 장점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얘기겠지만 스피드가 빠른 선수들은 최소한 구단주나 감독이 한번쯤은 눈여겨 보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포스팅에서 다룰 스피드 즉 속도는 100m 기록은 아니고 순간적인 스피드를 얘기하는 것 입니다. 자동차로 얘기한다면 순간적으로 가장 빨리 달린 속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 "나 이 차로 180km까지 밟아 봤어"라고 얘기할 때 바로 이 180km가 순간 최대 스피드 즉 순간 속도라는 의미입니다. 아마도 아래의 TOP 10 포함되지 않은 또 다른 선수들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유명하다고 판단되는 선수 10명을 선정해 보았습니다.   이전에 작성한 글인  공의 스피드 가장 빠른 구기 종목 TOP 10 (공의 속도가 가장 빠른 스포츠) 도 스포츠 분야에서 속도와 스피드에 재미있는 내용이 많으니 관심있는 분은 읽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10위: 라파 실바 (포르투갈) - 순간 최대 속도: 34.0 km/h 실바는 사실 스피드 보다는 벤피카와 포르투갈 대표팀에서의  출중한 기량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선수입니다. 그가 빠른 선수라는 사실은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 엄청난 스피드의 소유자라는 것이 놀랍습니다. 9위: 이스마일라 사르 (세네갈) - 순간 최대 속도: 34.4 km/h 현 시점에서는 이스마일라 사르는 스피드 보다는 그의 출중한 기량으로 더 잘 알려진 선수입니다. 전문가들은 그가 개인기와 스피드를 조금 더 조화롭게 사용한다면 더 좋은 선수가 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8위: 비니시우스 주니어 (브라질) - 순간 최대 속도: 34.7 km/h 개인기의 측면에서는 브라질에는 훌륭한 선수들이 상당히 많았었고 지금도 정말로 많습니다. 하지...

차범근이 세계 축구 레전드인 여러가지 이유들

차범근은 1970년, 1980년대에 유럽무대를 주름잡던 한국 축구의 레전드입니다. 차범근의 독일 분데스리가에서의 활약은 정말로 인상적이었지만 당시에 국내 팬들은 가끔 녹화로 중계되는 분데스리가 경기를 통해서만 그의 활약상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그 당시의 한국의 경제 수준이 독일 분데스리가의 중계권을 구매할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가끔 일요일 아침에 녹화로 중계해 주던 차범근의 모습은 당시에는 조금은 낯설고 새로웠던 기억이 납니다. 월드컵에서의 차범근의 모습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한국의 경기를 중계하던 많은 해외 방송사들의 아나운서와 해설자들은 그가 공을 잡으면 이름 차범근 대신 “차붐”이라는 그의 별명 으로 그를 호칭할 정도로 그는 유럽에서 널리 알려진 선수였습니다. 요즘 손흥민을 "소니"라고 부르는 것처럼 차범근의 이름 대신 별명을 부른다는 것은 그 만큼 그가 최소한 유럽에서는 상당한 인지도가 있는 선수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장면이었고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 그는 얼마나 위대한 선수였는가? 이번에는 그가 얼마나 위대한 선수였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와 기록들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79-80시즌 독일의 키커지에서 선정한 전반기 시즌 외국인 선수 평가 순위가 있는데 이 순위에서 외국인 선수 1위에 오른 선수가 바로 차범근 선수 였습니다. 당시에 독일 분데스리가가 세계 최고의 리그임을 감안한다면  외국인 선수 1위는 실로 대단한 기록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냥 K리그를 상상해 보시면 K리그에서 활약했던 샤샤, 데얀, 사리체프 등 유명한 선수를 우리가 다 기억하듯이 독일의 대부분의 축구팬들은 차범근선수를 알고 있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최근(2020년)에는 차범근의 67번째 생일을 맞이하여 레버쿠젠 등 분데스리가 3개 구단이 생일축하의 글 을 홈페이지와 SNS 등에 올렸습니다. 그가 소속되었던 팀에서 그가 레전드가 아니었다면 이런 메시지를 보냈을리가 없었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