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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특이했던 야구 선수 4명 (feat. 야구공과 대화한 선수 등)

역사를 통틀어 저마다 고유한 기이함과 성격을 가진 별나고 특이한 야구 ​​선수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다음은 지금까지 가장 이상한 야구 선수들을 나름 조사해서 정리한 내용입니다. (1) "Spaceman" Bill Lee : 빌 리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보스톤 레드삭스와 몬트리올 엑스포스에서 뛰었던 투수였습니다. 그는 파격적인 행동과 솔직한 견해로 인해 "우주인( Spaceman )"이라는 별명 을 얻었습니다. 그는 마리화나에 대한 사랑으로 유명했으며 종종 야구의 보수적 정치에 반대했습니다.  (2) "The Bird" Mark Fidrych : 마크 피드리치는 1970년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투수였습니다. 그는 야구공과 대화를 하고  투수의 마운드를 손으로 손질 하는 등 마운드에서 특이한 행동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또한 "The Bird"라는 별명을 얻은 독특한 곱슬 머리를 가지고 있었던 선수였습니다. 그의 별난 점에도 불구하고 Fidrych는 재능 있는 선수였으며 1976년 아메리칸 리그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했습니다. (3) Dock Ellis : 다크 엘리스는 1970년대 피츠버그 파이레츠의 투수였습니다. 그는 워밍업 중에 머리에 머리를 마는 컬러를 착용 하고 타자에게 던지는 것을 포함하여 필드 안팎에서 거친 장난으로 유명했습니다. 엘리스는 또한 LSD라는 마약을 투여하고 이에 영향을 받는 동안 무안타 투구를 했다고 주장했지만 이 주장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습니다. (4) "Moose" Bill Skowron : 빌 스코우론은 1950년대와 1960년대 뉴욕 양키스 및 기타 팀의 1루수였습니다. 그는 땅딸막한 체격과 거친 태도 때문에 "무스(Moose)"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스코우론은 몇 주 동안 같은 양말을 신고 주머니에 토끼 발을 들고 다니는 특이한 미신 으로도 유명했습니다.  

기네스북 오른 말도 안되는 야구기록 10가지

기네스북에 등재된 놀라운 기록 정리 오늘은 기네스북에 오른 기록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  야구분야에서도 기네스북에는 많은 기록들이 올라와 있는데 그 중에 특이한 기록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  흥미롭다고 생각되는 10 개의 기록들을 뽑아보았으니 재미있게 봐 주셨으면 합니다 . 자 ! 그럼 하나 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최장 경기시간 : 82 시간 38 분 37 초 현재 기록된 최장 경기시간은 무려 82 시간 38 분 37 초라고 합니다 .  이 기록은 미국 일리노이스주 미조리지역에서 56 명의 아마추어선수들이 달성했다고 합니다 .  점수와 이닝에 관계없이 최장시간 기록을 위해서 쉬지 않고 3 일 넘게 게임을 했다고 하네요 .  이전 기록은 76 시간 26 분 53 초라고 합니다 .   여자 최고 스피드 : 67mph (111.05km/h) 현재 기록된 여자선수 최고구속은 67 마일 ( 약 111.05km/h) 라고 합니다 .  이 기록은 로렌보덴이 미국 켈리포니아 클레몬트에서 2013 년 작성한 기록이라고 합니다 .   MLB 최고령 출전 : 만 59 세 80 일 이 기록은 1965 년 9 월 25 일 켄사스시티 소속이었던 사첼 페이지가 작성한 기록입니다 .  1965 년 작성된 기록이니 정말 오랫동안 깨지지 않은 기네스북 야구 기록 중 하나입니다 .   최저 방어율 : ERA 0.54 이 기록은 2016 년 잭 브리튼이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작성한 기록입니다 .  기네스북에서는 한 시즌 50 이닝 이상 던지 투수에 한해서 기록을 인정한다고 합니다 .  브리튼은 67 이닝을 투구하여 4 개의 자책점만을 허용해 이 기록을 달성했습니다 .   최고가 야구배트 : 1,265,000 달러 ( 약 15 억원 ) 미국 메...

무탈삼진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맞혀 잡는 투구의 달인 투수 장호연

오늘은 우리나라 프로야구에서 3번째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짱꼴라”라는 별명을 가졌던 투수 장호연 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장호연 선수는 1983년 부터 1995년 까지 13시즌 동안 OB 베이스에서 만 선수생활을 한 원클럽맨으로 완투형 선발투수로 잘 알려진 선수입니다. 아구팬이라면 장호연 선수를 모르는 사람은 많이 없겠지만 그는 활약에 비해서 많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레전드 선수 중 한명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서 장호연 선수가 프로야구에 남긴 의미있는 기록들과 그의 독특한 투구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장호연 선수은 사실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의 야구명문 대구상고에서 고등학교 2학년 까지 선수생활을 하다가 충암고로 전학 한 특이한 이력을 가진 선수입니다. 그는 대구상고에서는 투수로서 생존이 어렵다 판단하였고 학교에 전학을 요청하여 충암고로 팀을 옮긴 고등학교 시절 부터 범상치 않은 선수였습니다. 그는 충암고 졸업 후 동국대에 진학한 후 고교시절의 설움을 씻으며 서서히 투수로서 두각을 나타냈고 1983년 OB에 1차지명으로 뽑혀 프로에 진출하게 됩니다. 원년 우승팀 OB는 박철순 선수의 부상으로 1983년 개막전 선발투수의 선정에 고심이 많았는데 코칭 스탭은 신인 장호연을 개막전 선발로 내세우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우려반 기대반으로 등판한 장호연 선수는 MBC 타자들을 다양한 구질로 요리하며 개막전 경기에서 완봉승을 거두며 프로야구에서 그의 존재를 알리게 됩니다. 이날 장호연 선수는 120㎞대 직구를 던지다 직구보다 빠른 시속 135㎞짜리 슬라이더를 던지는 등 속도와 구질을 변화시키며 개막전 완봉승의 기록을 만들어 냅니다. 개막전 완봉승에도 불구하고 프로 첫해 장호연 선수는 6승 17패로 부진한 성적을 기록합니다. 하지만 많은 경기에 등판하며 타자를 상대하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해 갔습니다. 장호연 선수의 어록 중 “공 3개로 삼진을 잡는 것보다 공 1개로 맞혀 잡는 게 낫다”라는 말처럼 그는 맞혀 잡는 투구로 시즌을 ...

너무 잘해서 신인상을 받지 못한 타격의 달인 "장효조" 선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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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직도 많은 팬들이 기억하고 있는 타격의 달인 장효조 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배트를 거꾸로 잡아도 타율 3할을 칠 수 있다던 타격 천재 장효조는 프로 10년 동안 전무후무한 통산 타율 0.331를 보유한 레전드 선수입니다. 그가 보유하고 있는 또 하나의 불멸의 기록은 1985년 부터 1987년 까지의 3년 연속 타격왕입니다. 이 기록도 당분간 깨지기 힘든 기록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장효조 선수는 아마추어 시절부터 어마 무시한 타격 기술을 가진 모든 투수의 공포의 대상이었고 이미 아마추어 타격 타이틀을 싹쓸이 한 너무나 대단한 선수였습니다. 그럼 먼저 그의 아마추어, 프로 시절의 기록을 하나 하나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장효조 고교시절 성적 먼저 고등학교 시절 그의 주요 대회별 타율을 아래의 그림에 정리해 보았습니다. 장효조 대학, 실업시절 성적  이번에는 대학, 실업야구 시절 주요 기록을 아래의 이미지에 정리해 보았습니다.  장효조 선수의 아마추어 시절 기록 중 가장 놀라운 것은 100타석 이상을 치면서 1번도 아닌 2번의 4할 타율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1982년에는 한국에서 세계 야구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위해 국가는 주요 선수들의 프로행을 1년 미루는 결정을 하였습니다. 워낙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었던  장효조도 당연히 대표팀에 선발되어 동기생들 보다 1년 늦은 1983년에 프로야구 선수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장효조 프로야구 성적 프로 진출 첫 해, 장효조 선수는 물오른 타격감을 보여주며 무려 0.369로 타율 1위를 차지하며 프로의 세계에서도 또 한번 타격의 달인임을 입증합니다. 또한 타율 뿐만 아니라 0.601로 장타율 1위, 0.475로 출루율 1위를 기록하여 그의 신인왕 수상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압도적인 기록에도 장효조는 신인상을 수상하지 못하였습니다. 1983년 신인상 수상자는 장효조 선수가...

박노준, 비운의 야구선수였지만 선동열에게는 강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비운의 야구선수”라는 단어를 떠 올릴 때 항상 생각나는 선수인 “박노준” 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박노준 선수는 고등학교 시절 최고의 기량을 가진 야구선수였고 또한 당시 엄청난 팬들을 몰고 다닌 고교야구 최고의 전국구 스타였습니다. 그러나 박노준 선수는 프로진출 후에는 팬들의 기대에 못미치는 활약을 하며 그의 프로선수 생활은 항상 “비운의 스타”라는 수식어와 함께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프로야구에서의 부진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당대 최고의 투수였던 선동열 선수에게는 상당히 강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박노준 선수가 선동열 선수에게 얼마나 강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두 선수의 고둥학교 시절 대결부터 살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고교시절 박노준 선수와 선동열 선수의 대결의 하이라이트는 1980년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박노준은 선린상고 2학년 이었고 선동열은 광주일고 3학년 이었는데 두 선수 모두 고교야구를 대표하는 최고의 선수들이었습니다. 이 경기에서 광주일고는 선동열 선수를 선발로 등판시켰고 선린상고는 5회에 박노준 선수를 구원투수로 등판시키며 그들은 투수로서도 대결을 하고 있었습니다. 박노준 선수는 선동열 선수를 상대로 6회에는 동점타를, 8회에는 2점 홈런을 때려내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게 됩니다. 박노준 선수는 타자로서 홈런 포함 4타수 3안타 3타점의 맹활약을 펼쳤고투수로서는 4.2 이닝 1실점으로 역투하며 경기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이 경기에서 완투패를 당한 선동열 선수는 이 경기를 회고하며 “이후 20년 가까이 더 선수생활을 했지만 그때의 패배가 가장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라고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팬들은 대학야구에서도 그들의 또 다른 대결을 기대했지만 1년 차이로 두 선수 모두 고려대에 진학하면서 그들의 대결은 프로무대에서나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들은 함께 대학시절에도 수 고려대를 정상에 올려 놓은 적도 있으며 1982년 세계 야구선수권 대회...

야구선수 "푸이그"에 대한 궁금했던 3가지, "험난했던 쿠바 탈출", "배트 핥기", "류현진과의 영어 대화 "

이번 포스팅에서는 쿠바 출신으로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던 야구선수 “야시엘 푸이그”에 대한 흥미로운 3가지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푸이그 선수가 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쿠바를 탈출하려고 했는지, 또 그 탈출 과정은 어떠했는지를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푸이그는 2008년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대회에 참가해 쿠바 대표팀이 3위를 차지하는데 기여하며 이미 청소년 시절 부터 가능성을 인정받은 선수였습니다. 쿠바리그에서는 2009년 – 2010년 시즌 타율 0.330 17홈런 47타점을 기록하며 쿠바 내에서 최 정상급 선수로 평가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쿠바에서 나름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고 있던 푸이그가 쿠바 탈출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그의 어머니가 가족 모두의 미국으로의 망명을 희망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미국에 가서 돈을 벌어서 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을 항상 꿈꾸고 있었고 이런 그의 생각이 그가 쿠바 탈출을 시도한 계기라고 합니다. 푸이그의 쿠바 탈출은 처음부터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는데 그는 여러 차례 탈출에 실패하였고 이로 인해 수용소에서 감금되어 1년여 동안 야구를 못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2012년 푸이그는 결국 쿠바 탈출을 위해서 조금은 위험한 선택을 하는데 그것은 쿠바 출신 망명 브로커와 계약을 통한 멕시코로의 탈출을 시도였습니다. 파체코라는 이 브로커는 멕시코 마약조직에게 푸이그의 멕시코로의 탈출을 부탁했고 마약조직은 그 대가로 미화 25만 달러를 요구했다고 합니다. 브로커 파체코는 25만달러를 대신 지급할 것을 약속했으며 푸이그는 메이저리그 진출 시 연봉의 20%를 지급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이며 멕시코로 밀입국을 시도합니다. 마약조직은 2012년 6월 13일 마약밀반입에 사용하는 스피드 보트에 푸이그를 태워 멕시코로 데려가게 되었고 결국 푸이그는 쿠바 탈출에 성공하게 됩니다. 하지만 브로커가 마약조직에게 약속한 돈을 지불하지 않아 푸이그는 한동안 감금되었으나 파체코가 사람들을 고용해 푸이그를 마약조직으로부터...